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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구토》Jean-Paul Sartre, <La Nausée>, 1983

by tammy-susu 2020. 4. 16.

Nausea. 구역질. 메스꺼움.

장 폴 사르트르, 1905~1980

문예출판사

 

> 원서 발행인의 서언

앙투안 로캉탱. 1932년 1월 초순의 일기.

중앙 유럽, 북아프리카, 극동지방을 여행하고 드 로르봉 후작에 관한 역사 연구를 완성하고자 3년째 부빌에 체류하고 있었다. p.9 

 

> 날짜 없는 쪽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던가. 그것만이라도 알았다면 벌써 많이 진보했을 것이다. p.13

 

변화한 것은 나인 것 같다. 그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이다. 그것은 또한 가장 불쾌한 해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은 내가 그 갑작스런 변동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p.16

 

> 1932년 1월 29일 월요일

크메르의 불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6년간에 걸친 잠에서 깨어났다. 불상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심각한 권태에 사로잡혀 있음을 느꼈다. ... 나의 정열은 사라져버렸다. ... 이제 나 자신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혹한 일은 내 앞에 거대하고 무의미한 하나의 관념이 맥빠진 듯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 그것은 나의 마음에 너무도 심한 불쾌감을 일으켰기 때문에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모든것이 나에게는 메르시에의 수염 향내와 뒤범벅되어 있었다. 

 

축적되어가는 모든 징조가 내 삶의 새로운 파괴의 전조라면, 정말 나는 두렵다. 나는 생겨나려고 하는 것, 나를 사로잡으려는 것 ......이 두렵다. 그리고 수개월 또는 수년이 지났을 때, 지쳐빠져서 실망한 모습으로 새로운 폐허의 한복판에서 개어나게 될 것인가? 너무 늦기 전에 나의 내부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을 똑똑히 알고 싶다. p.18

 

> 목요일 아침, 도서관에서

뤼시가 ...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 그녀는 남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그 여자는 자기의 불행을 그저 약간, 그저 조금씩, 이리저리 생각한다. 그러면서 덕을 보기도 하는 셈이다. 

사람들이 그 여자를 위로해 주는데다, 또한 충고를 하는 듯이 침착한 말투로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면 마음이 후련하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혼자 방안에 있을 때는 생각을 안 하려고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온종일 음울하고, 이내는 피로하고 시무룩한 빛을 보인다. ... 나는 혹시 그 여자가 ... 호되게 고통을 느끼고 절망 속에 빠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여자는 옹졸해지고 만것이다. p.29

(진실 외면=용기 없음=직면 불가, 불행을 이리저리 이용하는 자세, 옹졸함) 

 

>금요일

오후 3시. 3시다. 이 시간은 무엇을 하려고 항상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각이다. 오후의 어정쩡한 시간. p.33

 

벽에 흰 구멍이 있다. 거울이다. 함정이다. 나는 이 함정에 걸려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틀림없이 걸려들었구나. 거울 속에 회색빛 물체가 나타난다. 나는 가가이 가서 그것을 본다. 이제는 거기서 떠날 수 없다.

내 얼굴의 반사이다. ... 그 얼굴에서 나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남의 얼굴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내 얼굴에는 그것이 없다. 내 얼굴이 잘생겼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조차 없다. ... 사실은 사람들이 흙덩어리를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듯이, 그러한 종류의 형용사를 나의 얼굴에 부여하는 것이 놀랍기조차 하다. ... 확실히 거기에는 코가 있고 눈이 있고 입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것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간적인 표정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안니나 벨린은 내가 생기 있는 외모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너무나 내 얼굴에 익숙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주아 아주머니가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내게 말하곤 했다.

"너무 오래 거울만 보면 원숭이처럼 보인단다." 나는 훨씬 더 오래 들여다보았나 보다. p.37

(게슈탈트 붕괴같은 것. 내 생각엔, 어쩌면 내게 더 익숙한 것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들일 것이라 생각한다. 뭉뚱그려 볼 수 있는 것, 모호한 것, 왠지 알고 있는 듯해도 그렇지 않은 추상적인 것, 그래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은 자신에게 매우 해체적으로 존재한다. 오히려 공들여 집중해 나를 들여다보아야 타인처럼(의미가 부여된 한 개체처럼) 여겨진다. 그런 통합이 일어나면 그때야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인다. 평소의 자신은 온종일 타자를 판단하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감각으로 타자를 판단하듯이, 나 자신을 감각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마치 타자를 판단하듯 한다. 모르겠다. 자신은 해체와 통합을 반복하는 것 같기도 하다.)

 

>토요일 정오 

가장 평범한 사건이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속고 있는 점이다. 한 인간, 늘 이야기를 하는 자이며, 자기의 이야기타인의 이야기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다. 이야기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본다. 또 남에게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사느냐, 이야기하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인간이 살고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배경이 바뀌고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그뿐이다. 결코 출발이라는 게 없다. 나날이 아무런 운율도 이유도 없이 나날에 덮친다. 그것은 끊임없고 단조로운 덧셈이다. 가끔 사람들은 부분적인 소계(小計)를 낸다. 이를테면 나는 3년 간 여행을 했다. ... 그 다음에는 행렬이 다시 시작된다. 사람은 다시 시간과 날짜의 덧셈을 시작한다. 월, 화, 수, 4월, 5월, 6월. 

 

산다는 것이 그런 거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변화이다. 그 증거로,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정말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그 반대 방향으로 얘기한다.

 

'1922년 가을의 어느 아름다운 저녁때였다. 나는 그 당시 마롬의 공증인의 서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시초부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말부터 시작하고 있다. 결말이 눈에는 안 보이지만 거기에 있으며, 그 말에 시초로서의 장엄함과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면서 시작되는 사실의 왜곡. 거짓.)

 

'나는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마을로부터 멀리 나왔다. 나는 돈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결말이라는 게 있어서 모든 것을 변형시킨다. 우리에게, 그 친구는 이미 화제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그의 우울, 그의 돈 걱정은 우리들의 근심 걱정보다 더 귀중한 것이며, 미래의 정열의 빛에 의하여 찬연한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사실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순간순간은 조금씩조금씩 쌓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들을 잡아당기는 이야기의 결말에 의해 덥석 붙잡히고, 각 순간은 그보다 앞서는 순간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밤이었다. 거리는 쓸쓸했다.'

...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날 밤의 모든 사소한 일들이, 예고되었고, 약속되었던 일을 체험한 것이라는 느낌을 우리는 가진다. ... 우리는 그 때에, 미래가 아직 거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 친구는 아무런 예고도 없는 밤, 그에게 단조로운 풍성함무질서하게 제공하던 밤에 산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택은 하지 않고 있었다.

 

내 생활의 순간순간이, 추억으로 되씹는 생활의 순간처럼, 연결되고, 질서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그것은 시간의 꼬리를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pp.78~81

 

>일요일

교회당에서는 큰 촛불의 빛을 한 몸에 받으며 한 사나이가 꿇어 앉은 부인들 앞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p.82

(크크크. 의미는 부여한 것이고, 인간은 움직이고, 사물은 있을 뿐이지.) 

 

그들의 정상적인 상태는 침묵이고, 말은 그들을 가끔 사로잡는 가벼운 열병 같았다. p.99

 

군중들은 아침보다 더 요란했다. 그 모든 사람들은 점심을 먹기 전에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던, 그 사회의 계급을 유지하는 힘을 잃어버린 것같이 보였다. ... 그들은 그저 인간일 뿐, 아무 계급도 대표하지 않는다. p.101

(만들어진 것들, 만든 것들, 그것들로 만들어진 삶, 거짓과 진실이 뒤범벅된 일상.) 

 

그들은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은 월요일 9시에 새 기분으로 출발하기 위해 필요한 젊음을 저축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까? ... 잠든 사람들의 그것과 같은 규칙적이고 깊은 숨소리만이 그들의 생존을 입증하고 있다. 나는 늑대처럼 걸었다. 쉬고 있는 이 비극적인 군중 속 어디에 나의 튼튼하고 신선한 육체를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바다는 이제 석판빛이었다. ...

 

"가스통, 눈이 부셔요."

"허! 기분 좋은 태양이야."

"따뜻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기분이 썩 좋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유감이야, 역광이지."

그들은 카유보트 섬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p.103

('나의 튼튼하고 신선한 육체'가 썩어가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은 더러웠다. 어떻게든 삶의 이치를 깨달아 팔팔하게 존재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떻게든 특별하게 이야기를 찍어다 붙여, 그저 존재하는 것들을 미화시키는 일상, 그 기만이 싫었다. 기만으로 점점 혼미해지는 나의 모습이 싫었다. J,그들의 연애는 시간을 혼미하게 할 뿐이었다. A는 자명하다. 더욱 땅에 곧게 서게 한다.

 

'내가 인간들을 사랑하게 되려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순간적으로 자문해보았다. 그러나 결국, 오늘은 그들의 일요일이지 나의 일요일은 아니었다.

... 나에게는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있다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과 번갯불같이 돌연 생겨나는 마음속의 움직임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 그것은 마치 '구토' 같은 것이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여간 어떤 모험이 나에게 생긴다. 그래서 내가 자문할 때 '나는 나이며, 나는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p.105 

 

"모험의 감정, 그것만큼 내가 집착하는 것은 아마도 없을 거야. 그러나 그것은 오고 싶을 때 온다. 그것은 그렇게도 빨리 떠나가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떠나가버렸을 때, 나는 얼마나 허무한지! 내가 삶(사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것은 나에게 아이러니한 그 짧은 방문을 하는 것일까?"

내 뒤, 그 도시에서, 곧게 뻗은 큰길 속에서, 가로등의 싸늘한 조명을 받으면서 사회적인 대사건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일요일의 종말이었다. p.109

 

>월요일

스무 살 때, 나는 술에 취한 다음 나 자신을 데카르트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p.109

 

모험의 감정은 확실히 사건으로부터 생겨나지는 않는다. 모험이란 차라리 순간순간이 서로 얽히는 그 방법에서 생긴다. 갑자기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것, 즉 한순간이 다른 순간에 인도되며,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에 인도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매 순간이 사라지고, 그것을 붙잡아두는 게 어리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건에서 이 특징의 원인을 찾는다. 다시 말하면, 형식에 관련된 것을 내용에 연관시켜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여자가 늙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그 여자가 늙는 것을 보는 것 같고, 또 그 여자와 더불어 자기도 늙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이 모험의 감정이다. p.110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형태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추측한다. 그것의 현존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사순절 전 화요일

사실 그녀의 눈은 열려 있지만 그것은 벌어진 틈에 불과하다. 늘 그렇게, 그녀는 손님에게 속히 시중을 들지 않는다. P.122

 

로제 의사에 대한 묘사. <인간이 꼰대가 되는 과정과 이유>

훌륭한 주름살이다. 그는 모든 주름살을 가지고 있다. 이마의 주름, 눈꼬리의 주름, 입 끝의 심한 주름, 게다가 턱 아래로 흐른 누렇고 굵은 주름살까지. 재수가 좋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 남자를 보면 그는 고생을 했고, 인생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생김생김에 어울릴 만한 가치가 그에게는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과거를 보존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를 박제로 만든 것이다. 거기에서 부인용 경험, 젊은이용 경험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아실 씨(평범한 노인네)는 단순히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공통된, 어떤 관념에 쉽사리 인도될 수 있는 하나의 예이다. 나는 얼마나 그가 사람들에게 속고 있으며, 잘난 체하는 놈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싶은지 모르겠다. 경험의 직업인이라니? 그들은 그들의 삶을 마비와 반수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들은 서둘러서 결혼했고, 되는 대로 자식을 만들었다. 그들은 카페에서, 결혼식에서, 장례식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따금 소용돌이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모르면서 발버둥쳤다. 그들 주위에서 생겨난 모든 일은 그들의 시야 밖에서 시작되어 그 밖에서 끝났다. 모호하게 기다란 형태를 가진 것, 멀리서 온 사건이 그들을 재빨리 스쳐가고, 자세히 보려고 했을 때에는 모든 것은 이미 막을 내려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개의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2수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2수를 넣으면 물렁물렁한 캐러맬처럼 이에 달라붙는 듯한 귀중한 충고가 나온다. 나도 여기 그 식으로 하면 사람들의 집에 초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내가 '영원' 앞에서의 위대한 나그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마흔에 가까워지면 발산해버릴 수 없는 경험으로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다행히도 그들은 자식을 만들었고, 자식들로 하여금 당장에 그 경험을 소비하게 한다. 그들의 과거는 없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추억은 응결되어 오붓하게 '예지'로 변하고 있다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한다. 편리한 과거이기도 하다! 호주머니의 과거, 아름다운 격언으로 가득 찬 조그마한 황금색 책이다. 

"나를 믿으시오, 나는 경험에 입각해서 얘기합니다. 나의 지식은 모두 생활에서 얻은 것이오."

 

보편적 개념. 그것에 사람들의 마음이 끌리기 쉽다. ... 그들의 예지는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을 일, 되도록 살지 않을 일,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일 등을 요청한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경솔한 자나 독특한 자가 벌을 받는 이야기이다.  ... 아실 씨의 양심은 아마 그다지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는 만약 자기가 아버지나 누나의 충고를 들었다면 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의사는 말할 권리를 갖고 있다. 그는 자기의 삶을 망치지 않았으며, 자신을 유용하게 만들 줄 알았다. 평온한 마음으로 권리를 뽐내며, 그는 그 표류물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바위이다.

 

......갑자기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이 사람은 머지 않아 죽을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말 시체의 모습과 비슷해진다. 그들의 경험이란 그런 것이다. 자주 내가 경험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경험,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요새이다. 의사는 마지막 요새를 믿으려고 한다. 그는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눈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고독하고, 알아낸 것도 없고, 과거도 없이 지성은 우둔해지고 육체는 무너져간다는 그 현실에 대하여. 그래서 그는 벌충이 될 만한 자질구레한 망상을 꾸며 그것을 잘 정돈하고 잘 꿰매어놓았다. 그는 자기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고에는 구멍이 나 있어 머릿속에서 그것이 헛바퀴를 도는 때가 있는 것 같다면, 그것은 그의 판단엔 청춘의 성급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책에서 읽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금 책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며, 성교를 못하게 된 것은 전에 했기 때문이다. 했다는 것은 아직도 하고 있다는 것보다 낫다. 멀찍이 물러설 수 있어야 판단도 할 수 있고, 비교도 반성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 무서운 시체의 얼굴, 그것을 거울 속에서 맛보는 경우를 위해서, 그는 경험에 의해 얻은 교훈이 얼굴에 새겨졌다고 생각하려고 애쓴다.

 

나의 미소가, 그가 감추려고 애쓰는 모든 것을 드러냈으면 좋겠다. ... 그를 깨우쳐 줄 것이다. ... 그러나 나는 기회를 이용할 줄 모른다. 나는 공허하고 침착하게 이 폐허의 하늘 아래 정처없이 간다. pp.130~135

(분명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으면 삶은 밀려가고 떠나간다. 말 시체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내가 육체도, 정신도 단단히 붙들고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하자고 시도때도 없이 마음을 먹는 것은, 아마도, 난 이 삶을 평균보다 더 사랑하거나, 집착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실패라고 간주된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다가 '성공'하지 못한 것도 실패로 간주된다. 그러나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는 지루하게 생각을 이어가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실패'의 날들로 연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가 얼마나 사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연륜의 주름은 있을지언정 확신과 기쁨의 여유, 그 활기찬 광채가 사라진, '말 시체 같은 얼굴'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날이 내게도 와버리는 것이 아닐까, 혹은 완전히 반대로, 영혼이 말라비틀어진 자판기 같은 경험조차도 가지지도 못해서, 기교적 관계마저 성취하지 못한 채, 냄새만 풍기며 점차 사라지는 육체로 썩어가진 않을까.

지금의 나는 광채 나는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언젠가 선택에 '구토'나는 날이 오면 다른 형식으로 삶을 만들어갈 수 있겠지만, 과연 그 때에도 정신을 붙들고 갈 수 있는 열정이 있을까? 그 열정은 자연히 사라지는 것일까? 갈고 닦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거짓으로 점철된 삶이든, 솔직한 삶이든, 어떤 삶에도 우위는 없다. 내가 꾸며진 삶, 거짓된 삶에 메스꺼움을 느끼는 것은 다만, 내가 솔직한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내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당당한 얼굴로 순수 세계를 표류하며 뽐내고 싶기 때문이리라.)

 

 

>수요일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p.135

 

>토요일 오후

나의 존재의 권리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나는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존재할 권리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나타나서 돌처럼, 식물처럼, 세균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나의 생명은 되는 대로 여러 방향으로 싹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미 죽어버린, 결점이 없는 그에게 있어서, 국방군 파콤의 아들인 장 파콤에게 있어서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심장의 고동이라든가 신체 기관의 희미한 소리가 그에게는 순간순간 순수한 작은 권리 같은 형태가 되어 울려왔던 것이다.  (존재하기마저 권리로 인식된다)

60년간 그는 낙담도 하지 않고 존재의 권리를 행사했다. ... 사는 데 대한 가장 작은 의문도 결코 그 눈동자를 스쳐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파콤은 실수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기의 의무를 수행했다. 자식으로서의 의무, 남편으로서의 의무, 아버지로서의 의무, 또 우두머리로서의 의무...... 모든 의무를 그는 완수했다. 그는 또 강경하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했다. 어린애로서는 화목한 가정에서 오점 없는 이름과 번창하는 사업 상속자로서 훌륭하게 키워질 권리를, 남편으로서는 부드러운 애정에 둘러싸여서 공경받는 권리를, 아버지로서는 존경받을 권리를, 우두머리로서는 불평 없이 순종받을 권리를 요구했다. 왜냐하면 권리라는 것은 의무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란 얼마나 단순하고도 어려운 일인가!" 

그는 켤코 그 이외에 자기 반성을 하는 일이 없었다. 우두머리란 원래 그런 것이다. pp.160~161

 

파로탱. 부빌 변호사협회 회장.

그의 시선은 추상적 관념 같았고 순수한 권리로 반짝이고 있었다.

... 그 사람은 어떤 관념의 단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죽은 살순수한 권리만이 남아 있다. 진정한 소유의 경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권리'에 사로잡혔을 때 그 권리를 추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장 파로탱은 자기의 '권리', 그것만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내가 미술관에 갈 때마다 느끼게 되는 가벼운 멀미 대신에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아낀다는 그 괴로운 권리를 목덜미에 느꼈을 것이다. p.167

... 나는 권세로 빛나는 얼굴을 정면에서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그 광채가 사라지고 재투성이 찌꺼기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찌꺼기에 나는 흥미가 있었던 것이다.  p.168

... 이 어두운 캔버스들이 나의 시선에 제공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에 의해서 재고된 인간이었다. 유일한 장식으로 가장 훌륭한 정복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라는 꽃다발이다. 나는 타의 없이 인간의 지배에 감탄했다. p.169

(권리란 인간이 부여한 것이다. 법률이 없다면 권리도 없다. 만들어진 그것을 걷어내면 인간은 존재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단 한번도 그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단 말인가? 만들어진 말들 사이에서 고통스러워 하다, 만들어진 세계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 의문을 한참동안 품고 있었다. 

답답한 의문을 한번에 해결해줬던 생각은, '그런 사람이 원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고, 그나, 나나, "권리"라는 것을 추방하거나 재영입할 순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마저도 '존재하는 것'임을. 흥미가 있는 것임을.)

 

나는 보르뒤랭 르노다 실 끝에서 끝까지 걸어갔다. 나는 돌아다봤다. 작은 그림의 성당 속에 한없이 고운 백합이여 안녕, 우리의 자존심이여, 우리의 존재 이유여 안녕, '더러운 자식들'이여 안녕. p.178  (덕지덕지 붙은 너저분한 것들이여, 안녕)

 

>월요일

나는 더 이상 로르봉에 대한 책을 쓰지 않고 있다. 마지막이다. 더 이상 그것을 쓸 '수'가 없다. ... 후작은 현존해 있었다. 역사적인 존재 속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자리잡게 만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나의 생활을 그에게 빌려주고 있는 터였다. 

... 과거, 현재, 그리고 세계에 관한 그 고찰에 견뎌낼 수가 없었다. ... 거기에는 현재가 있을 뿐이었다. 내가 지금 막 쓴 글씨들, 아직 마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pp.178~179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각기 현재 속에 처박힌 가볍고 튼튼한 가구, 즉 탁자며, 침대며, 거울이 달린 양복장과 나 자신이었다.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과거는) 나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 이제 나는 알았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아무것도 없다'. p.180

... 그것들에(서류들에) 의존해서 로르봉과 알게 되기보다는, 당장 쟁반점(table turning,심령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로르봉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p.182

로르봉 대사건은 끝났다. 마치 큰 열정처럼, 다른 일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p.183

(거짓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내가 더 이상 건축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다. 거짓들과 쓰레기를 덕지덕지 바르는 것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드 로르봉 씨는 나의 협조자였다. 그는 존재하기 위하여 나를 필요로 했으며, 나는 나의 존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가 필요했다. 나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에 써야 좋을지 몰랐던 원료, 즉, 존재, '나의' 존재라는 원료를 공급하고 있었다. ... 나의 삶을 빼앗고 있었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보지 못하고 있다. ... 그는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p.184

기다리고 있던 '물건'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것은 나의 내부에서 흐른다. 나는 그것으로 충만해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다. 자유롭고 해방된 존재가 나에게 밀려오고 있다. 나는 존재한다. p.186

 

'그날 나는 드 로르봉 후작에 관해서 책을 쓰는 것을 단념했다'고 나는 써야만 할 것이다.

 

제기랄, 왜 이렇게 오늘은 사물이 강렬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p.188

(자신의 존재에도 어쩔 줄 모르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일work일 수도 있다. 존재를 망각하기 위하여.)

 

>수요일

나는 걱정거리가 없다. 연금 생활하는 사람처럼 돈은 있으나 윗사람도 없고, 아내와 자식도 없다. 나는 존재한다. 그뿐이다. 게다가 나의 그 걱정거리는 대단히 애매하고, 대단히 형이상학적이어서, 나는 부끄럽다. p.198

 

>화요일

아무 일도 없다. 존재했다.

 

>수요일

휴머니스트와 논쟁.

미장트로프: 인간을 싫어하는 사람. 몰리에르의 희곡 중의 인물.

 

나는 방안을 훑어본다. 광대 연극이다. 모두 얌전하게 앉아서 먹고 있다. 아니다, 먹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부과된 일을 잘 하기 위해서 그들의 힘을 회복시키고 있다. 각자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개인적이고 보잘것없는 고집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그 누구에게, 또는 그 무엇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라는 귀중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먹거나 마시고 있지만, 존재하는 데는 어떠한 이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웃으면서 나는 그에게 말한다. 독서광은 신중해졌다.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p.209

 

그의 인간애는 천진하고 촌스럽다. 그는 시골뜨기 휴머니스트이다. p.211

 

맏형처럼 형제들 위에 허리를 굽히는, 책임을 가진 휴머니스트 철학자, 인간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사랑하는 휴머니스트, 인간의 이상적인 상태를 사랑하는 휴머니스트, 승낙을 얻은 다음 인간을 사랑하려는 휴머니스트, 인간이 원치도 않는데 인간을 구원하려는 휴머니스트,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려는 휴머니스트, 낡은 신화로 만족하고 있는 휴머니스트, 인간 속에 있는 그 죽음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 인간 속에 그 생명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 사람을 웃기기 위하여 언제든지 웃음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는 즐거운 휴머니스트, 특히 밤샘을 할 때 만나는 우울한 휴머니스트 등등 그들은 저희들끼리 서로가 증오하고 있다. 물론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가 아니다. p.219

 

휴머니스트는 어떤 의미에서 미장트로프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인 미장트로프이다. 그는 자기의 증오를 조합할 수 있으며, 후에 인간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우선 인간을 증오하는 것에 불과하다. p.211

"나는 인간을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나는 떠나가고 싶다. 어디든지 정말 '나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그 속에 나를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내 자리는 아무 데도 없다. 나는 여분의 존재이다. p.228

 

>저녁6시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다. 반대로 나는 압도되고 있다. 다만 나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나는 알고 싶었던 것을 알고 있다. 1월부터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구토'는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내게서 떠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에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어떤 병도 아니고 지나가는 발작도 아니다. 나 자신인 것이다.p.236

(존재할 뿐인 자아임을 발견했을 때, 슬픔이 밀려왔다. 나와 얽힌 그 모든 것이 끊어져버려, 남겨진 것은 개인이었다. 외로웠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임을 알았기에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나름의  '휴머니스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을 혐오할 것이란 걸 알았다. 두려웠다. 하지만 그 공포마저도 자신이었다. 그 자명한 사실 덕분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태, 형식, 자연 등은 더욱 날카롭고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렇게 나는 아주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검정색을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본다는 것, 그것은 추상적인 발명이며 씻겨지고 단순화된 관념, 인간의 관념이다. 거기 그 검정색, 형태가 일정치 않고 줏대가 없는 현존, 그것은 시각, 후각, 그리고 미각을 훨씬 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그 풍요함은 혼란으로 돌아가서 마침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p.244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이다. 원래,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것뿐이다. 존재하는 것이 나타나서 '만나'도록 자신을 내맡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연역'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다. 다만 그들은 필연적이며 자기 원인이 됨직한 것을 발명함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필연적 존재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우연성은 가장이나 지워버릴 수 있는 외관이 아니라 절대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상인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이다. 이 공원, 이 도시, 그리고 나 자신도 무상이다.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게 될 때가 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변하게 하고, 모든 것이 표류하기 시작한다. 요전 날 저녁때 역부 회관에서처럼 말이다. '구토'이다. p.245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연이라는 것 뿐이다. 만일 그것이 필연이라고 한들, 알 수 있는 것은 우연이라는 것 뿐이다. 그 이상은 보통의 인간이 알 수 없다. 한계다.)

 

이동이라는 생각 역시 인간의 발명이다. 너무나 명확한 관념이다. p.247

 

나는 존재에 관해서 알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배웠다. p.253

 

>토요일.

안니를 만나는 날.

"... 나는 현기증이 나고 편치가 않아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에요." (안니) p.268

 

"나는...... 나는 연명하고 있어요." 하고 안니는 우울하게 되풀이한다.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생존 이유를 알고 있단 말인가? 나는 그녀처럼 절망에 빠져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에겐 큰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나에게 주어진, '까닭 없이' 주어진 이 인생과 맞서서 놀라고 있다. p.282

 

> 화요일, 부빌에서

나는 자유롭다.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애써 찾아낸 모든 이유들은 사라지고, 다른 이유는 이미 생각할 수가 없다. 아직 충분히 젊고, 새출발을 하기에 충분한 힘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을 새출발해야 하나? ... p.291

나는 연명하련다.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나무들처럼, 물탕처럼, 전차의 붉은 의자처럼, 천천히 고요하게 존재하련다. 

'구토'는 나에게 짧은 순간을 남겨준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 p.292

습관은 유모처럼 나를 씻겨주고, 닦아주고, 옷을 힙혀준다. 나를 이 언덕까지 인도한 것도 역시 습관이었던가? p.293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또 하나의 오늘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요일이면 사람들은 약간 장식을 한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그들의 태연하고 안심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뒤집힌다. 그들은 법률을 제정하고, 대중 소설을 쓰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만드는 엄청난 바보 짓을 한다. .. 그네들은 속이 자연으로 충만해서 자연을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자연을 보지 못한다. p.294

 

>수요일(부빌에서의 마지막 날)

이제 나는 그들에게 아무 빚도 없다. ... 나는 자유다.

 

갑자기 독서광이 게이라는 게 밝혀진다. 도서관에서 옆에 앉은 소년을 더듬다가 들켜서, 결국 도서관 직원에게 주먹으로 얻어맞는 장면은 뜬금없는 전개였다. 독서광이 맞자, '나'는 분노해서 코르시카인(직원)을 한 대 친다. 그리고 게이 이임을 의심받는다. 정말로 뜬금없는 전개였다. 게이 독서광은 도서관에서 쫓겨난다.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였음에도. '나'는 독서광이 사랑에 빠진 모습을 흐뭇하게 설명한다. 

 

독서광은 자기의 자아를 아직 잃지 않고 있으며, 잊을 수도 없다. 그 사형받은 자아, 사람들이 끝까지 해치우지 않은 피 흘리는 자아를 말이다.  ... 불안한 얼굴이 의식 앞에서 지나가고 다시 지나간다. '아마 독서광은 자살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 부드럽고 쫓기는 그 넋은 죽음을 생각할 수가 없다. p.317

 

그렇다. 실존주의자는 휴머니스트가 되기 위하여 먼저 '미장트로프'가 되어야 함을 말했던 것처럼. 사회는 거짓(만들어진 것, 꾸며진 것)이므로, 그 규칙도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 의미할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 같아서, 뭔가, 놓치는 것 없이, 버려진 쓰레기 없이 다 정리하고 떠나는 것 같은 결말이다. 그렇게 부빌을 떠나는 것도. 

 

내게 남아 있는 30만 프랑을 1년 동안에 전부 써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러나 그것이 내게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새 양복? 여자? 여행? 나는 그 모든 것을 경험했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이제는 그런 욕망이 없다. 남는 것은 그것뿐이다! 나는 1년 후에도 오늘처럼 공허하고, 추억도 없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있을 것이다. 

서른 살! 그리고 1만 4천 4백 프랑의 연금, 매달 받는 이자. 그러나 나는 늙은이가 아니다! 무엇이든 나에게 할 일을 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무엇을 한다는 것은 존재를 창조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존재는 그게 아니라도 얼마든지 있다.

사실은, 펜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구토'를 느낄 것 같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그것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머리에서 생겨나는 일을 쓰고 있다. p.321

(존재하기 <=> 존재를 망각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하기. 두려움 때문에 나는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세계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도 추했다. 그래서 나는 내 집에 있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했다. p.323

 

무슨 일을 내가 해볼 수 있을 것인가...... ...  그것은 책이라야 할 것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사책이 아니다. ... 예컨대 어떤 이야기, 생겨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어떤 모험, 그것은 강철처럼 아름답고 굳어야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간다. 몽롱하다. 결정할 수가 없다. ... 한 권의 책. 물론 처음에는 그것이 지리하고 피곤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도, 또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도 막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그것이 남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그 책의 조그마한 박명이 나의 과거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아마도, 나는 그 책을 통해서, 나의 생활을 아무 혐오감 없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p.330

(존재하기, 욕망과 함께 끝까지 존재하기. 혐오감을 느끼기 싫어서라도, 미래의 어느 순간을, 현존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존재하는 것은 할 수가 없다. 나는 알았고, 나는 존재한다. 나는 자유다.)

 

내가 했던 몇 년 간의 고뇌가 책 한권에 잘 정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실존을 깨달았을 때의 메스꺼움, 존재가 하나하나 강렬하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부담감, 그 때의 메스꺼움 같은 것까지도. 신기한 경험이다. 생각과 감정이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것이. 또한, 불교 사상과도 아주 많이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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