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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 기시미이치로/고가 후미타케,《미움받을 용기》

by tammy-susu 2021. 7. 8.

p.63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p.66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

어쨌거나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네. 

 

p.80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자네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지. 아들러는 말했네.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지.

 

p.81

고독을 느끼는 것은 자네가 혼자라서가 아닐세. 자네를 둘러싼 타인/사회/공동체가 있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독한 거지. 우리는 고독을 느끼는 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네. 즉,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되는 걸세.

 

p.82

"인간의 고민은 죄다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이는 아들러 심리학의 근저에 흐르는 개념일세. 만약 이 세계에 인간관계가 사라진다면 그야말로 우주 공간에는 단 한 사람만 존재하고, 다른 사람이 사라진다면 온갖 고민도 사라질 걸세.

 

p.83 

개인에 국한되는 고민, 이를테면 내면의 고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어떤 종류의 고민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철학자는 말했다. 자네는 대인관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된 것이라고. 자신을 싫어함으로써 인간관계로부터 도망친 것이라고.

 

 

p.168

자신의 삶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뿐이야.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세.

 

p.241

행위 차원 X, 존재 차원의 감사

위독한 상태의 어머니는,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자네나 가족에게 큰 위안이 될 걸세. 만일 자네가 생명이 위태로워서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은 '자네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크나큰 기쁨을 느낄 걸세. 직접적인 행위가 없어도, 그저 무사히, 지금 이곳에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할거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이상적인 모습'을 멋대로 지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린다네.

이상적인 모습을 100점으로 놓고 천천히 점수를 깎는다네. 이거야말로 '평가'라는 발상이지.

누구와 비교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그저 거기에 있어주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네. 

이상적인 100점에서 감점하지 말고, 0점에서 출발하는 거지. 그러면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을 걸세.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가 밥을 먹은 후에 설거지를 도와줬다고 하세. 이때 "그런 건 안 해도 되니까 학교에나 가." 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의 용기를 꺾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야. 하지만 순순하게 "고맙다"라고 표현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아이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을지도 몰라.

 

p.245

인간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상황에 따라 이리 바꿨다 저리 바꿨다 할 만큼 임기응변에 능한 존재가 아닐세. 요컨대 '이 사람과는 대등하게', '이 사람과는 상하관계로'라는 식이 안 된다는 거지.

만약 자네가 한 사람이라도 수직관계를 맺고 있다면, 자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파악하고 있는 걸세.

 

...자기수용>>타자신뢰>>타자공헌>>자기수용...

 

p.265

"상대가 배신하지 않으면 나도 주겠다"는 건 담보와 조건이 달린 신용관계에 불과하다.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과제 분리: 배신은 타인의 과제다.)

 

배신으로부터 비롯된 슬픔은..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하게. 고통이나 슬픔을 피하려고 하니까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걸세. 이렇게 생각해보게. 우리는 남을 신뢰할 수 있네. 의심할 수도 있지. 또한 우리는 타인을 친구로 생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네. 믿을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선택은 명확하지 않은가.

 

p.272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지.

 

우리는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확인받고 싶어서 일하고 싶어 한다.

 

p.275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보라는 걸세.

그렇게 공헌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눈앞의 현실은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게 될 거야. 

 

 

[아들러 심리학이 제시한 목표]

행동의 목표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

2.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질 것

 

 

 

p.291

인간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단, 그때의 공헌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즉 '공헌감'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철학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행복이란 '공헌감'이라고.

 

"우리 인생에도 '길잡이 별'이 필요하네.

그 별은 이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절대적인 이상향이라네."

 

길잡이 별= 타인에게 공헌한다.

 

p.307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기.

 

p.319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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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철학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찰나의 연속.

주체는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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